2017년 12월 18일 월요일

파올로 베로네세의 '예수와 백인 대장'

파올로 베로네세 작, '예수와 백인 대장(Jesus and the Centurion)' 1571




중학교 시험은 초등학교 때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길어진 수업 시간과 엄해진 선배들의 눈빛도 그랬지만 시험을 몇일간 나눠서 본다!!   이 얼마나 벼락치기로 준비하기 좋은 시스템인가.   몇 과목의 시험을 끝내고 집에 와도 12시 전후.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오후의 집에서 노닥거리는 시간이 좋았다.(시험이란 스트레스는. 결국 밤샘으로 미루다가 시험 점수야 엉망이 되었지만)

더군다나 시험이 끝난 마지막 날에는 학교에서 영화관에 보내준다!!!
전체 학생이 가는 것도 아니고, 가고 싶은 친구들과 가라고 할인권을 줬던 거지만, 덕분에 부모님없이 친구들끼리만 갔던 학교 부근 영화관에서 본 첫 영화, 벤허.(이때 터미네이터도 볼 수 있었는데, 학교에서 나눠준 건 벤허 할인표라 투덜댔던 기억이...)


영화 벤허(1959년작) 포스터
<출처: 위키백과>


무슨 내용인지 보다는 친구들과 본다는 것이 신이났던 그 영화의 어마어마한 스케일도 놀랍고, 유대인 귀족 '벤허'의 과도한 인생 변화도 놀랍지만(나중에 영화 글레디에이터 주인공도 못지않지만...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현실의 변화는 더 심한 것 같아), 친구이자 경쟁자로 나왔던 로마인 귀족 '멧살라'의 간지도 장난이 아니었다. 
붉은망토와 깔 맛춤한 투구의 깃털은 머리통 보다도 크다
<출처: 영화'벤허'중 로마 귀족 멧살라 (스티븐보이드 역) >

그런데 이 멋진 멧살라가 맡았던 역할이 로마장교 백인 대장이다.   로마군의 핵심 전력은 갑옷으로 무장하고 칼과 창, 방패를 들고 싸우던 중보병이란다.   영화에서 한 줄에 10여명씩 뒤로 6~10줄 정도의 사각형 대형을 갖추고 싸우던 그들.    이들 중보병의 제일 앞 줄에는 전투 경험이 적은 젊은이(이들은 '하스탈리'[1]라고 부른단다)들이, 중간열에는 굳건히 대열을 지킬 수 있는 30대의 경험있는 보병인 '트린키페스'[2]가, 뒤쪽은 40대 이상의 전투 베테랑인 '트리아리'[3]들이 버티고 싸웠다고 한다.   이때 백여명 정도하는 한무리 중보병을 지휘하는 대장이 바로 백인 대장이다.
[1] Hastati, 어려서 팔팔하고 저돌적이고, 겁도많고 까불대다가 도망도 자주가서 맨앞에 세웠단다.   무장은 빈약해서 가슴짝에 청동판 하나만 걸쳤다고 하는데, 젊음을 무기로 싸웠군
[2] Principes, 로리카(Lorica)라고 하는 단단한 가죽으로 만든 상체를 보호하는 갑옷으로 약간의 금속장식이 붙어 있는 튼튼해 보이는 가죽옷?을 입고 하스타(Hasta)라고 부르는 짧은 창을 들고 앞열이 무너져도 굳건히 버티는 핵심 전력이었단다
[3] Triarii, 헬멧에 3개의 깃털을 달고 싸운 최고 고참병으로 구성되었다.   음... 이런 구성, 무척 효율적일 것 같은데 좀 짠하다
맨아래가 앞쪽으로 붉은색 순서대로 하스탈리, 트린키페스, 트리아니가 정렬한다
<출처: jefffletcher.deviantart.com>

지금이야 군대에 가면 군화, 총, 탱크 등을 국방부에서 주지만 로마에서는 자기가 탈 말과 사용할 칼, 갑옷등은 자기돈으로 샀다.   그러다 보니 로마의 중보병인 '벨리테스'는 평민 이상의 어느정도 재산이 있어야 가능했다.  이들 중보병 병사들은 자신들을 통솔하는 백인 대장이 쫌 아니다 싶으면 교체를 요청하기도 했고, 백인 대장도 그 직책을 맡았는지 또는 몇 번에 걸쳐 임명 받았는지가 로마 군내에서 가장 큰 명예 중 하나였다고 한다.   앞장서서 싸우다 보니 그만큼 백인대장의 사상률도 일반병사보다는 훨씬  높아 율리우스 케사르가 '주사위는 던저졌다'며 로마로 들어가 구데타를 하기에 앞서 부와 권력을 거머쥔 갈리아 원정에서는 막강 12군단이 패전하며 백인 대장 전원이 먼저 죽는 경우[4]도 있었다고 하니 이 백인 대장이라는 자리, 동료와 전우에 대한 절대적 애정과 믿음이 필요한 자리다.  영화와 다른 건 실제로 백인 대장은 로마 귀족보다는 평민[5] 출신들이 더 많이 맡았다고.
[4] 전쟁에서 초급장교 사망률이 높은건 좀 일반적인듯.   6.25 전쟁 중 육군 종합학교에서 임관된 초급 장교 7.3천명 중 1.3천명은 전사, 2.3천명은 부상으로 반 정도의 사상률이었다고 한다.   젊음의 이름으로 흘린 피와 헌신에 애도.
[5] 평민도 로마 시민이다.   초기 로마에서 귀족들의 특권과 경제적 독식에 맞서 전쟁거부 등의 파업?활동으로 평민의 권리를 위한 호민관이란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기고 법적으로도 평민과 귀족의 차이가 제거된다

   물론 최하급 장교인지라 위로 켭켭히 별들이 쌓여있었겠지만, 최강 전투력을 몸에 익히고 부대원들과 부디끼며 신임을 받아야만 했던 이들 백인 대장들은 성경에도 등장한다.   미사 중 영성체를 하기에 앞서 되뇌였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라" 기도말의 주인공, 그 믿음의 주인공이 그들이다.    같은 사람인지는 모르지만(나무위키에서는 동일인이라는 설이있다고 소개), 성탄절마다 전례시간 중 예수님 죽음의 순간에 탄식조로 외치는 "그는 진실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로 외치는 목소리의 주인공, 그도 백인 대장이다.   

예수님이 사시는 마을, 또는 예수님의 집이 있던 곳이라고 불렸다는 '카파르나움'[6]에서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아래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말씀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는 백인 대장 이야기[7]는 그 믿음도 돋보이지만, 전우와 동료를 위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종도 염려하고,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함이 보여 더욱 멋지다.
[6] 카파르나움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낚았다는 갈릴레아 호수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 예수님의 기적이 이곳에서 다량 이뤄졌다고 한다.   아쉬운 건 이런 기적이 이뤄진 땅임에도 그 유명한 소돔과 고모라의 소돔보다도 더 예수님께 욕을 먹었다는 것.  
"너 카라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 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이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마태복음 11장 23절)"라니.   실제로 이곳은 이후 서기 614년에 페르시아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1894년 발굴작업에서 베드로 집터등을 발견했다고.
[7] 마태복음 8장 7~10, 물론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이 '가거라, 네가 믿는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자 바로 그시간에 종이 나았다는 이야기로 서프라이즈!
카파르나움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다.  이곳까지 로마에서 백인대장이 왔다니 역시 대단한 로마.
<출처: 구글지도>


   이 성경 속 백인대장을 그린 그림 중 하나가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라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8]에 있다.   입장료만 거의 2만원에 가까운(13유로, 2015년)에 이 미술관은 1819년(같은해 미국에서는 첫 경제공황이 있고, 일년전인 1818년 정약용이 목민심서 쓴 그 즈음)  문을 연 후 1868년 이사벨라 여왕때 국유화되어 3천점 이상의 회화가 전시되어 있다는 역대급 미술관이다.
[8] 홍페이지: https://www.museodelprado.es
프라도미술관 전경
<출처: 프라도미술관 홈페이지>

이곳에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가 1571년에 그렸다는 '예수와 백인대장'이라는 유화가 있다.  하지만 이 그림 속 백인 대장은 자신 종의 치유를 비는 강인한 로마군 장교가 아니다.   본인이 병들어 수척해 있어 자신의 병을 치유해 달라고 애쓰는 것 같아 보여 아쉽다.   하지만, 그림 속의 오고가는 많은 시선들 중에 유일하게 예수님의 자비로운 눈길과 눈맞춤 하고 있는 백인 대장의 눈동자에서 당신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보인다.   이런 믿음, 부럽다.
백인대장의 저 애절한 눈빛이란... 옆의 제자를 만류하며 그를 바라보는 예수님과 눈맞춤의 순간이다
파올로 베로네세 작, '예수와 백인대장' 중 일부 크롭, 1571
<출처: 위키미디어>




화려한 색깔과 주글 주글한 옷주름에서의 극명한 명암, 여기저기 번득이는 빛들과 많은 군인, 시종으로 가득 차 화려해 보이는 이런 그림은 '파올로 베로네세'가 활동했던 그 동네 화가들의 특징이다.   베네치아는 상업이 활성화된 항구도시로 북유럽은 물론 아시아 여러 지역과 활발한 교역의 영향으로 당시에 이탈리아 피렌체와 함께 르네상스 미술과 문화가 번영했다.   



이곳에서 '파올로 베로네세'는 석공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에게 조각 공부를 하던 중 그림에 소질을 보여 '안토니오 바딜레나'라는 화가 밑에서 그림을 공부 하고, 나중에는 그 스승의 딸과 결혼해서 장식화, 성화등을 주로 그리며 당대 최고 인기 화가 중 한 명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 말년에는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종교재판 이단 심문소에 불려갔다.  

무슨 그림때문일까 싶었는데, 그가 1573년에 그린 '최후의 만찬'이란 그림 때문.     당시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큰 불이 일어나서, 베네치아에 있던 도미니크 수도회도 당대 최고 화가 중 한명인 타치아노[9]가 그렸다는 그림이 소실된다.   이 불타버린 그림 이름이 '최후의 만찬'.   수도회는 역시 당시 인기가 높았던 '파올로 베로네세'에게 같은 이름의 그림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화가, 제목에 어울리지 않게 온갖 시종과 광대와 독일군들이 우글대고 식탁에서는 고기를 뜯고 있는 그림을 그려놨다.   문제는 도미니크 수도회가 철저한 원칙주의 수도회로 지금도 세계 4대 카톨릭 탁발(수도사들이 머리를 깍는다!!) 수도회로 유명한 곳인터라, 결국 이런 그의 그림은 수도회에서 인수가 거부될뿐 아니라 심지어 이 그림으로 그는 신성모독 협의를 받아 종교재판 이단 심문소[10]에 불려가게 된다.
[9] 타치아노 베첼리오(Tiziano Vecellio),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한창 성행했을때의 화가로 경제적으로도 엄청나게 성공한 화가.   당대 최고 재벌가인 데스몬 가문, 곤차가 가문, 파르네세 가문등에서 그의 그림을 모으는데 열을 올렸다고 한다.  지금도 그가 1599년에 그린 유화 '다이아나와 악테언'은 런던 내셔널갤러리와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에서 2009년에 약 740억원으로 공동구매하여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 중 하나가 됐다. 
[10] 종교재판 이단 심문소라니!  이런 곳은 13세기 당시 교황인 그레고리오 9세[11]가 도미니코 수도회에 해당 업무를 위임하여 처음 설치되어 운영되다가 1858년에 마지막 종교재판 후 폐쇄되었다.
[11] 그레고리오 9세는 178대 교황으로 이탈리아 아니니 지역에서 1145~1150년에 태어나 1227년~1241년동안 교황이었다고 한다.(그럼 80세에 교황이 되서 90세가 넘어 돌아가셨다는 건데, 그시대에 이런 나이라니... 놀랍다!)   당시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에서 이단으로 평가되던 무리들이 무력을 사용하는데 놀라 이단 심문소를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이때만 해도 심문소에서 고문은 허가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저나 이 분, 이단 처리도 골아팠을텐데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프라드리히 2세와 이탈리아 영토에 대한 통치권을 이유로 몇차례 전쟁도 치룬 걸 보면 연세에 비해 쫌 팔팔했던 듯. (서로 군대보내 싸우고... 교황은 황제를 이단으로 심판하기 위해 시노드를 열고, 황제는 시노드에 참석하는 종교인들을 막을려고 배를 침몰시키거나 나포하는등... 난리도 아니었단다)
의도하지 않은 악테언의 기웃거림에 놀란 요정의 살색이 난무하는 이 그림이 750억원 이란다.
타치아노 베첼리오 작, '다이나와 악테언', 1599
<출처: Google Art & Culture>
이단 심문소에서 신성모독으로 지적한 것은 성경에 없는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서 '최후의 만찬'과는 다른 분위기가 되어버렸고, 피흘리는 난장이, 앵무새를 든 광대등은 물론 종교개혁으로 당시 카톨릭과 껄끄러웠던 독일의 군복을 입은 병사들을 주변에 빼곡히 그려놓았다는 것.   수도원에서 보기에는 이순신 장군 영정을 그려달라고 했더니 주변에 노닥이는 왜군들을 쫘악 그려놓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을지도.    게다가 지금은 타버려 알수없지만 기존에 '타치아노 베첼리오'가 수도원에 그렸었다는 '최후의 만찬' 이란 그림은 아마도 1559년에 그가 그린 그림 '그리스도의 매장'을 보건데 매우 엄숙하고 장중하게 그려져 있지 않았을까 싶어(물론, 어디에도 그렇다는 자료는 없다.  그냥 근거없는 상상) 상대적으로 더 큰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절망과 슬픔이 어두운 빛을 타고 흐르는 이 엄숙한이 주는 몰입감이란!
타치아노 베첼리오 작, '그리스도의 매장' 1599
<출처: 위키미디어>

하여간 이 재판에서는 그려져 있는 어릿광대와 독일병사 등은 덧칠해서  완전히 없애버리고, 막달라 마리아[12]를 그려 넣는 것으로 명령을 내리고 이 조건을 수용하는 것으로 석방이 되었는데, 이 화가는 그림의 이름을 '최후의 만찬'에서 '레위 집안의 만찬'으로만 바꾸고, 그림에는 다른 첨삭을 하지 않았다.   이때 재판에 나간 파올로 베로네세는 "화가는 시인이나 미치광이가 누리는 것 과 똑같은 자유를 갖는다"며 작가로써의 상상으로 그렸을 뿐 다른 신성모독의 의도는 없었다는 변론[13]을 했다하는데 멋진거냐, 무모한 거냐. 
[12] 최후의 만찬인데 막달라 마리아를 그려 넣으라고?!?   이건 좀더 알아봐야 할 듯.   거의 다빈치 코드 급 클루다.
[13] 생각컨데 당연한 말을 했다 싶지만, 비슷한 논란이 요즘도 있는 걸 보면 왠지 그때가 더 융통성이 있었던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희희덕 거리는 왜구를 그려놓은 이순신 영정을 보고 뭐라고 하니까 이건 이순신 영정이 아니고 그냥 장군 코스프레 그림이야 하며 끝내도 모두들 만족해 하는 것과 같은 시츄에이션? 
최후의 만찬을 왁자지껄한 식사로 표현하고 싶을 수 있겠지만, 이걸 중세시대에?
파올로 베로네세 작, '레위집안의 잔치' 1573
<출처: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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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오는 겨울의 어느날 오후.
예전의 시험 기간 중 여유로운 오후를 그리며 찾아 본 벤허의 '멧살라'와 같은 간지는 없지만,
'파올로 베로네세'의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외쳤던 화가로서 자유를 찾아보고,
그의 '예수와 백인 대장' 그림 속에서 반짝이는 백인 대장의 소망과 믿음의 눈길에 함께 눈을 맞춰 본다.

"한 말씀만 하소서, 저의 영이 곧 나으리라"
그의 기도도 잊지않고 함께 따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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